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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역사적 연구 관점

by 오키나와 백곰 2024. 7. 7.

소크라테스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크라테스-사진
소크라테스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많은 일들이 알려져 있으며,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연구할 경우에는 자료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료의 내용이 확실치 않은 데 문제가 있다. 그가 아테네의 시민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토론으로 보내며, 무보수로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가 철학을 가르친 것은, 물론 소피스트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형 판결을 받고 기원전 399년에 약 70세의 나이로 처형을 당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아르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그를 풍자한 것을 보더라도 그가 아테네에서 잘 알려진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확실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 밖의 것은 많은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그에 대하여 많은 것을 기록하였지만, 각각 내용이 매우 다르다. 그리고 버넷에 의하면 일치되는 경우는, 플라톤이 쓴 것을 크세노폰이 베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크세노폰의 견해를 따르고 어떤 사람은 플라톤의 의견을 좇으며, 또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의 의견을 다 배격한다. 나는 이와 같은 위험한 논의에 대해서는 그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다만 여러 가지 견해를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우선 크세노폰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군인으로,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의 견해는 대체로 보수적이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경건치 못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을 받은데 대하여 몹시 괴롭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매우 경건하며, 젊은이들도 그에게서 대단히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진부하고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던 것 같다. 크세노폰의 이러한 변호는 지나쳐, 소크라테스의 적대자들의 입장은 해명하지 않았다. 버넷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크세노폰의 변명은 지나치게 성공적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크세노폰이 변명하는 것과 같은 인물이라면, 그는 결과 사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크세노폰의 말은 다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하여 상상할 만한 두뇌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으리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현명한 사람의 말에 대한 우매한 자의 보고는, 결코 정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들은 바를 자기 분별력으로 고쳐서 해석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가 나에 대하여 보고해 주는 것보다 오히려 철학자들 중에서 나의 심한 적대자가 나에 대하여 보고해 주었으면 한다. 따라서 우리는 크세노폰의 말이 철학의 어려운 문제를 해명하고 있든, 또는 소크라테스가 부당하게 정죄된 것을 입증하고 있든 간에,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크세노폰의 회상 가운데 일부는 정당한 것도 들어 있다. 크세노폰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하면 능력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가를 언제나 문제 삼았다고 한다. 그는 곧잘 이렇게 질문하였다.

 

"구두를 고치려면 어떤 사람을 고용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어떤 순진한 청년이 대답하였다.

 

"소크라테스님, 그야 구두장이지요."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목수, 구리 세공인 등에 대하여 질문해 나간다. 그리고 드디어 질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국가라는 배는 누가 고쳐야 할까?"

 

소크라테스가 30인 참주들과 충돌하였을 때 이들의 우두머리인 크리티아스는 그에게 계속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금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제화공이나 목수, 구리세공인이나 가르치는 것이 좋겠소. 당신이 이들에게 가르친 교훈을 생각할 때 지금쯤 이들은 이미 발밑에 짓밟혔을 것으로 알고 있소.

 

이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스파르타인들이 세운 과두 정부의 짧은 치하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대체로 민주주의를 실시하여 장군들까지도 선거로 뽑거나 제비에 의해 뽑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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